“타자를 주체로서 존중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예술적 사기다.”
타자화된 채 박제된 여성들을 위한 문학적 진혼굿
여성의 관점으로 ‘고전’, ‘걸작’의 조건을 질문하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달과 6펜스》, 《안녕 내 사랑》, 《위대한 개츠비》, 《나자》, 《그리스인 조르바》, 〈날개〉, 〈메데이아〉. 이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국가에서 쓰인 작품이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첫째, ‘걸작’으로 불리며 오래도록 읽혔다는 점. 둘째, 모두 여성을 모욕하여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점.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은 소위 ‘고전’, ‘걸작’으로 소개되고 읽혀온 이들 작품을 비판적으로 재독해하여 고전, 걸작의 조건을 질문한다. 핵심 질문은 두 가지다. 문학을 지배하는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문학 작품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위 작품에서 여성 인물은 대개 악녀, 속물, 거짓말쟁이, 정신질환자, 마녀, 억압자, 예술적 객체 등으로 재현되었다. 긍정적으로 그려질 때도 있지만, 철저히 남성에게 종속되어 그들에게 돌봄과 재생산 노동을 제공했을 때만 그러했다. 반면 남성들은 여성들이 모욕을 감내하는 동안 위대해지고, 자유를 얻으며, 초월적 지위를 얻고, 보편적인 권위를 확보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었다는 점이다. 예술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영향을 끼치며 자신의 관점을 재생산한다. 때문에 이들 작품의 여성혐오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욕당한 여성들을 위한 문학적 진혼굿을 통해 그들의 빼앗긴 명예를 복권하는 일이 시급한 이유다.
악녀, 속물, 거짓말쟁이, 정신질환자, 예술적 객체…
모욕당한 여성을 복권하기 위한 여덟 가지 질문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을 쓴 여덟 명의 저자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여성을 모욕한 걸작을 고발한다. 먼저 한승혜는 사회가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정신병’을 활용해온 역사의 연장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독해한다. 단지 남성에게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했다는 이유로 ‘말괄량이’ 취급받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교정’당하는 주인공 카타리나에게서 ‘미치광이’로 몰린 모든 여성의 초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훈은 실존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삼은 《달과 6펜스》를 거슬러 읽으며 ‘위대한 남성 예술가 신화’가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추적한다. 여성을 철저히 도구 취급하는 남성 예술가의 폭력성이 ‘천재성’으로 해석되어온 역사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김용언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을 좌절된 남성성의 어긋난 발현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한다. 전쟁 후 남성들이 겪은 존재론적 위기가 ‘여성을 퇴치하라’라는 장르 문법의 확립으로 이어졌다는 독해는 ‘중립적’이라 여겨지는 장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심진경은 낭만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정말 위대한지를 질문한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미국의 신여성인 ‘플래퍼’를 타자화한 후에야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라영은 초현실주의의 주창자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를 거슬러 읽으며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찬한 ‘발작적 아름다움’이 무엇을 대가로 했는지를 심문한다. 노동계급 여성 나자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의 구체적 삶을 보기를 거부했을 때만 ‘발작적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고발한다. 조이한은 현대인들이 자유의 대명사로 여기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자유가 철저히 남성에게만 허락된 영역이었다는 점을 성토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여성혐오적 언어를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그 안에 담긴 남성 중심적 인식을 폭로하기도 한다.
정희진은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키워드로 〈날개〉를 독해한다. 식민지 남성성 개념을 통해, 우리는 아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남성이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라 주장하는 역설을 중층적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장은수는 모든 ‘마녀’의 원형인 〈메데이아〉의 주인공을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전사로 재해석한다. 메데이아의 ‘악행’이 사실은 능력 있는 이방인 여성을 향한 당대의 차별적 시선에서 연유했다는 점을 밝혀 그녀의 억울함을 달래주는 것이다.
여성을 모욕하는 문학적 관습에서 벗어나
고전 목록을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
여성이 문학에서 어떻게 모욕당해왔는지를 살펴보는 보다 간편한 방법도 있다. 몇 명의 저자가 공통으로 사용한 방법은 작품의 성별 뒤집기다. 아무도 천방지축 남성을 ‘말괄량이’로 부르지 않고, 남편을 두고 ‘길들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말괄량이 길들이기〉). 남자가 자신을 유혹한다며 ‘악마’라고 손가락질하는 여성은 상상할 수 없다(《그리스인 조르바》). 남성성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고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데도 남편이 자신을 억압한다며 비난하는 아내(〈날개〉),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으나 처참하게 버려지는 남편(〈메데이아〉)도 마찬가지다. 즉, 수많은 ‘걸작’은 여성을 남성보다 낮은 위치에 고정시켰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 구조를 활용한다.
중립을 가장한 남성 화자를 내세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달과 6펜스》, 《안녕 내 사랑》, 《위대한 개츠비》, 《나자》, 《그리스인 조르바》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화자는 ‘객관적 관찰자’를 표방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며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작중 남성 화자는 끝내 남성 주인공이 설파하는 가치를 독자에게 설득시키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중립적, 객관적 관찰자는 여성 타자화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여성의 관점에서 걸작을 다시 읽는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의 시도는 고전의 의미를 확장적으로 재정의한다. 고전은 의미가 고정된 채 절대적 권위를 뿜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거리를 풍부하게 가진 작품이야말로 고전이라 불릴 만하다.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은 동시대의 관점에서 고전의 가치를 다시금 고민해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는 고전의 목록을 다시 작성할 수도 있다. 여성을 타자화하지 않는 걸작, 여성을 주체로 존중하는 고전의 목록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도서명 |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
---|---|
저자 | 한승혜, 박정훈, 김용언, 심진경, 이라영, 조이한, 정희진, 장은수 |
출판사 | 문예출판사 |
출간일 |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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